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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RCH(교회)/SADARI CHURCH(사다리교회)

개혁주의 관점에서 바라 본 절기에 대한 바른 이해(크리스마스 다시보기)

매년 12월 25일이 되면 난 그날을 크리스마스가 아닌 공휴일로 쉰다.(이 표현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우리는 교회 절기에 대해 그리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다. 그 이유를 설명하려니 에드먼튼의 갈보리교회의 윤목사님(한번도 뵌적은 없고 동생목사님은 페북에서 아는)께서 잘 정리를 해 주신 자료가 있어 그것을 그대로 옮겨놓았다.

좀 긴 감이 있지만 끝까지 정독한다면 유익한 지식이 되는건 확실한데 피와 살이 될런지는 모르겠다.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본 절기에 대한 바른 이해 

(부제 : 개혁주의 장로교회를 바르게 세우는 종교개혁의 자리)

 

 

 

윤성목 목사 / 총신대학교, 합동신학대학원 졸, 캐나다 에드먼튼 갈보리장로교회(미주 고신, www.edcalvary.com) 담임, 개혁주의신앙의 바른 이해를 위한 연구모임 대표 역임

 

 

 

(성경 본문 / 갈1:6~12, 4:8~11, 골2:16~23, 히8:5~13)

 

 

 

* 들어가는 말

 

 

 

오늘 저는 그동안 교회력을 따라 지켜오는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오늘날 교회가 지키고 있는 여러 절기들에 대한 성경적인 바른 가르침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사실 이 절기에 대한 문제는 상반기에 세미나를 통해 교회적인 입장을 성경적으로 정리함으로서 여러 성도님들이 오해 없는 마음으로, 지금의 교회들이 행하는 절기를 바르게 바라보길 원했습니다. 이유야 어떻든 오늘 시기적으로 추수감사절을 맞이하는 시점에 이러한 기회를 통해 교회절기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와 함께 그로인한 신앙의 바른 자세를 분명히 해야 하겠기에 이 말씀을 준비하였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종교적인 행사로 여겨온 절기에 대해 모범적인 장로교회가(종교개혁의 내용을 따라 세워져 가는 성경적인 교회) 어떤 입장을 갖고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참으로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주의 말씀을 따라 상고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우리 기독교 교회들이 지키는 절기에는 여러 절기들이 있습니다. 크게는 부활절(사순절 포함),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성탄절) 등 입니다. 이러한 절기에 대하여 먼저 전제(前提) 되어 생각할 것은 “과연 현재 지켜지는 절기가 성경적인 내용을 잘 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가 바른 신학을 통하여 바른 교회를 세우며 바른 신앙으로 생활하는 믿음의 자리는 항상 어떤 외적인 형식으로, 아니면 형태적으로, 습관과 관습으로, 전통적으로, 또는 의식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는 처음부터 개혁주의 신앙의 유산을 따라 ‘오직 성경이 제시하는 은혜의 방식’을 좇아 그 내용을 교회의 터로 삼고 나아갑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있어 중요한 전제(前提)는 오늘도 참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진리의 말씀을 따라 교회의 신앙의 자리를 지속적으로 확인해야 하며, 그리하여 말씀이 가르치는 곳에 신앙을 두며, 말씀이 아닌 곳에 항상 말씀을 따라 개혁해 가는 자기부정의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단지 일평생 전통과 습관과 종교적 행사를 해 왔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냐?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의 계시된 뜻을 바르게 보지 못하는 것이며, 이는 더 나아가 말씀의 무지함으로 오는 종교생활에 불과한 것임을 우리는 늘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이 바른 진리의 내용과 그 내용에 따른 신앙적 자세를 가지는 것은 오직 성경이 제시하는 계시에 의존된 방식(계시의존사색(啓示依存思索))을 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과연 우리가 이러한 기독교의 절기를 대할 때에 마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이전에 해 오던 방식대로 할 것인가? 아니면 주변의 교회들이 하는 방식대로 할 것인가? 아니면 성경의 교훈을 따라 할 것인가?’라는 마음의 자세가 대단히 중요하리라 여겨집니다.

 

성도 여러분!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것은 우리 갈보리 장로교회는 처음부터 성경적인 장로교회(곧 개혁주의 신앙으로 세워지는 장로교회)를 표방합니다. 참으로 우리는‘진리(眞理)에 죽고 진리에 사는 교회의 자세’를 가지고 나아갑니다. 바로 이러한 자세를 간직하는 것은 우리가 그동안 막연히 해 왔던 시대의 흐름과 사상에 무분별하게 따르지 않아야 하는 것이며, 단지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즐겨하고 환호하며, 말씀의 분별없이 그렇게 하는 것이 교회의 유익과 내 자신의 신앙의 만족을 위한 것인 양 주장할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신앙의 표준은 믿음의 선배들이 외쳤던 종교개혁의 구호처럼‘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서’주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신앙의 모습을 바르게 세우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혹여 ‘왜 우리교회는 이러한 절기를 강조하지 않고, 그냥 아무런 행사도 없이(특히 일 년에 한번 먹어 볼까 말까한 맛있는 터어키를 먹는 축제의 즐거움도 없이...) 그냥 그렇게 평범한 주일로 보내는가? 참 이상하다.’여기실지 모르겠습니다. 또는 ‘우리교회가 다른 교회들이 다하는 절기를 지키지 않으니 이상한 교회는 아닌가?’혹은‘이단은 아닌가? 그래도 이단은 아니더라도 과연 그것이 성경적인가?’또한 어떤 분들은‘야! 갈보리 장로교회는 절기도 지키지 않으니 너무 재미도 없다’든지..., ‘이전에 교회에서는 한 주 전에 절기헌금도 하도록 헌금봉투도 주보에 넣어 주고, 그래서 교회 재정에 유익도 되고, 또 이런 기회에 전교인 친교도 되는데... 왜? 하지 않은가?’라는 의문을 가지기도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떻습니까? 그렇게 생각이 드시죠. 저도 그렇습니다.

 

아무튼 성도님들 중에는 ‘그동안 절기를 잘 지키면서도 무리 없이 신앙생활을 아무 탈 없이 잘 해 왔는데 갑자기 교회가 개혁주의 장로교회를 한다면서 왜? 이렇게 다른 교회들이 다 하는 절기를 지키지 않는지..., 또한 강조하지 않는지..., 의문을 가지고 말씀은 못하시고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을 맞이하는 기회를 따라 그동안 교회가 지켜온 절기에 대한 성경적인 원리를 상고함으로서, 우리교회의 신앙의 내용과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바른 교회의 자세, 그리고 앞으로 우리 교회가 해 마다 맞이하는 절기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에 대한 교회적 자세를 정리하고 확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 이런 설교의 목적을 두고 정해진 시간 속에 전체의 내용을 세밀하게 전하지 못하는 한계로 인하여 모든 성도님들께 절기에 대한 성경적이며, 교리적, 역사적, 교회사적인 자료물(설교문)을 제공하여 바른 절기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합니다. 자료물을 잘 활용하시길 바랍니다.)

 

 

 

1. 본 론

 

1)성경적 근거

 

➀ 갈라디아서1장6~12절, 갈4장8~11절 / “본문 읽기”

 

먼저 본문의 갈라디아서의 배경을 보면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케 하는 당시의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 대하여 아주 엄히 경고하고 있음을 봅니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이 많은 갈라디아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유대주의자들의 무리가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주의자들은 구약의 많은 의식(규례와 절기와 제사 등)을 지키는 것이 아직도 신약 교회에 구속력을 가진다고 믿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개종한 이방인 신자들에게 구약의 의식과 절기들, 특히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으며 하나님을 참되게 섬기는 것처럼 주장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직도 구약의 제도아래 놓여있는 유대주의자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인‘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됨, 즉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이루신 율법의 완성(구역의 모든 규례와 절기와 의식을 성취하신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는 복음의 도리를 받지 못하고, 그들은 율법의 행위(곧 할례, 절기지킴 등)를 더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그들의 주장에 사도바울은 구약적 율법의 의식과 행위를 믿음에 첨가하는 행위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단번에 이루신 구속사역을 허무는 것이요, 복음을 변개(變改)하는 것임을 선언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약에 계시된 모든 절기와 의식과 규례가 예표하는 것은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그림자요 예표인 까닭에, 구약의 모든 율법과 의식법(규례와 제사제도, 절기 등)이 이제는 율법의 마침이요 완성자로 오신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하여 그 모형적인 그림자는 폐지되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오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신약 백성들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며, 믿음으로 하나님을 참되이 섬기게 됨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4장8절 이하에서‘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아는 자로서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구약의 규례와 제도와 의식법)으로 돌아가서 다시 종노릇하려고 하느냐?’고 밝히면서,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그동안 복음을 참되게 전한 것이 헛될까 두렵다.’고 까지 말씀한 것입니다.

 

 

 

➁ 골로새서 2:16-23에서도 사도 바울은 동일한 내용을 증거 합니다.

 

“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貶論)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그리스도)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儀文)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➂ * 히브리서7장27절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 히브리서8장5절 /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 히브리서8장13절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 히브리서10장1절 /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이처럼 사도바울이 증거 하는 말씀을 볼 때에 구약의 절기와 이와 관련한 제사법, 그리고 성전(성막)은 구약 백성들을 향한 율법 하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럼으로 구약의 율법의 기능과 역할 속에서 존재하던 것이 이제 율법의 수여자요 또한 완성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더 나은 법으로 오셨기에, 첫 번째 주어진 구약의 율법에 더 이상 매여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외적이며 형식적이며 의식적인 성전이 그의 죽으심과 부활로 참된 성전을 이루심과 함께 이제 이에 따른 구약적 절기와 제사도 당연히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의 삼대 절기로 일컫는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은 신약 교회에서는 지키지 않게 된 것입니다.

 

 

 

 

 

2) 구약의 절기들에 대하여(참고 내용)

 

1) 유월절, 칠칠절(오순절, 초실절), 초막절(수장절)

2)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예표로서 그림자의 역할을 한 것들이었다.

3)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더 이상 문자적으로 지키지 않게 되었다.

 

① 유월절에 대하여

 

▷ 신 16:1 아빕월을 지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유월절 예식을 행하라. 이는 아빕월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밤에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라.

 

▷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구원된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지키는 절기이다. 이 절기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악의 노예상태로부터 구원 받음을 예표하는 절기이다.

 

② 칠칠절에 대하여

 

▷ 맥추절(출 23:16), 오순절(행 2:1), 초실절(출 34:22) 등의 이름으로도 불렸다.

 

▷ 유월절로부터 7주간이 지난 후인 일곱 번째 안식일 다음부터 시작된다(레 23:15-16). 즉 유월절 이후 50일 만에 지키는 절기이다. 이 절기 때에 밀의 처음 익은 예물을 하나님께 드렸다.

 

▷ 이 절기 때에 특히 종과 객과 고아와 과부들을 돌아보아야 하였다(신 16:11-12).

 

③ 초막절에 대하여

 

▷ 장막절 또는 수장절(출 23:16, 34:22)이라고도 불렸다.

 

▷ 일곱 번째 달(디스리 월) 제 15일에 시작되어 일주일 동안 계속된다. 오늘날의 9, 10월경이다. 이 때 모든 백성들은 예루살렘에서 버드나무, 종려나무의 가지들을 모아 초막을 짓고, 7일 동안 세 가지 특별한 의식을 행했다.

1. 실로암 못에서 길어 온 물로 매일 아침 헌수의식을 거행하며, 2. 일곱 가지가 난 등대 4개로 성전을 밝히고, 레위인들은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를 부르며, 백성들은 피리소리에 맞추어서 춤을 췄다. 3. 새벽이 되면 제사장들은 성전 동쪽 문으로 가서 해가 뜨는 순간 성전을 마주보고 '우리의 조상들은 얼굴을 동쪽으로 돌려 태양을 경배하였지만, 우리의 눈은 여호와께 향해있다'고 외쳤다.

 

▷ 이러한 구약의 절기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예표로서 그림자의 역할을 한 것들이었다.

 

▷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이제 더 이상 문자적으로 지키지 않게 되었다.

 

 

 

3) 장로교 신앙고백서(신조적) 근거

 

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1장 1조 1~2항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합당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신바이다. 그것은 그의 계시하신 의지, 곧 성경말씀으로 한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상상이나 고안 또는 사단의 지시를 따라서 어떤 보이는 형상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아도 안 되고, 기타 비성경적인 방법을 사용해도 안 된다."

 

➁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 제33문 : 은혜언약은 항상 유일하고 동일한 방식으로 시행되었습니까?

답 : 은혜언약은 항상 동일한 방식으로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구약에서의 시행은 신약에서의 그것과 달랐습니다. (--> 구약에서의 시행과 신약에서의 시행)

 

* 제34문 은혜언약은 구약에서 어떻게 시행되었습니까?

답 : 은혜언약은 구약에서 약속, 예언, 제사, 할례, 유월절, 그리고 기타 여러 표상과 신탁들에 의해 시행되었는데, 그것들은 모두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하였고, 그에 의해 완전한 사죄와 영원한 구원을 받게 될, 약속된 메시아에 대한 신앙을 선택된 자들에게 일으키는데 그때로서는 충분하였습니다.

 

* 제35문 은혜언약은 신약에서 어떻게 시행됩니까?

답 : 그 실체인 그리스도께서 현시된 신약에서, 동일한 은혜언약은 말씀의 설교와 세례 및 성찬의 성례의 시행으로 시행되었고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하는데, 거기에서 은혜와 구원은 모든 나라에 보다 충만하고 분명하며 효과 있게 제시되었습니다.(---> 말씀의 설교 + 성례의 시행)

 

➂ 장로교회(개혁교회)의 교회사적 전통에서 절기 문제

 

* 역사적 장로교회의 절기에 관하여서는 이미 1556년 에딘버러 대회 이후에 계속 논의되었고, 1577년 4월에 열린 총회에서 공식적으로 부활절, 크리스마스 날과 그 이외의 다른 미신적인 절기 때에 성찬을 집례 하는 목회자에게와 강독하는 강독자에게 성직을 박탈하겠다는 조건으로 그러한 것을 시행하지 말 것을 경고하여야 한다고 규정합니다. 바로 이러한 근거로 제1 권징조례 제 9항에 부활절에 성찬식을 행하는 것을 반대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 1638년 글라스고우 총회(스코틀랜드) : 교회의 다양한 절기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보증되지 않음으로 완전히 폐지되는 것을 좋다고 여겼으며, 그것들을 지키는 목회자들은 관원들에 의해서 징벌을 받는 것이 좋다고 명문화 하였습니다.

 

* 1643년에 영국의회가 공식적으로 크리스마스, 부활절 또한 기타 미신적 절기들을 금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 이처럼 17세기 영국의 청교도들은 명백한 성경적인 기초가 없는 기독교의 절기들을 거절하였던 것입니다.

 

* 종교개혁 시대의 종교개혁자들의 절기에 대하여 : 종교개혁자들은 교회가 초대 교회와 멀어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교회 절기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이를 지키지 않음으로써 기존의 교회와 차별성을 가져나갔을 뿐만 아니라 이를 폐지해 나가려고 했습니다. 루터는 “주의 날이 유일한 절기의 날이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참으로 마음 괴로워하였습니다. 이는 칼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1536년에 제네바데 도착했을 때 ‘주의 날이 유일한 절기의 날'이라는 것을 개혁의 초기부터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성탄절을 지키는데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며 성탄절에도 여전히 매주 설교해 오던 본문을 그대로 이어서 설교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파렐도 주일 외에 다른 어떤 인간적인 제도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이들 모두는 이렇게 오직 주의 날만을 존중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은 각 나라의 개혁교회가 가진 공통된 특징이었습니다.

 

 

 

모든 신앙의 근거를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고자 했든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교회가 절기를 특별하게 기념해야 하는지에 대한 신학적 이해에 있어서 부정적입니다. 왜냐하면 구약 경륜 하에 주어졌던 모든 의식법들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서 폐지되었으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새 것을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신약 시대의 교회는 구약 시대에 의식법으로 주어졌던 성막(성전)과 제사와 관련하였던 절기법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신약 시대의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들에게 주어진 더 나은 법을 좇아서 삽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참되고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 시대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누리게 된 ‘주의 날', 곧 주일을 유일한 절기로 지킵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구속을 완성하신 주일에 모든 구약적인 의식과 절기를 다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일의 참된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탄생과 고난과 부활과 감사의 모든 계시의 내용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주일 이외에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빛으로 오셔서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 은혜를 기념할만한 것을 갖고 있지를 않습니다. 교회는 매 주일날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를 청종하는 것을 통하여서 그리스도의 구속을 기념합니다. 또한 교회에서 시행하는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례를 통하여서 그리스도의 구속을 기념하는 기쁨과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한 한 몸 된 거룩한 교통을 확인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매 주일날에 그리스도의 구속을 기념하면서, 또 다른 특정한 날을 갖고서 특정하게 그리스도의 구속을 기념하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주일을 도외시하는 것이 되며, 이는 종교적 형식과 외적인 의식으로 신앙의 본질의 자리를 대신하려는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생명의 연합체를 이루는 날인 주일에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선포하고, 그 안에 성도들이 누리는 모든 기쁨과 은혜와 안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굳이 신약 시대에도 여러 절기들을 주일과 구분하여서 지켜야 하는 것은 성경적인 지지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4) 오늘날 교회의 절기들에 대한 바른 이해

 

▷ 성탄절/ 부활절(사순절 포함)/ 추수감사절 ▷ 성경에 명시되지 않았다. ▷ 세속화 되었다.

▷ 이방종교의 미신적 풍습이나 그 민족의 문화적 뿌리를 가지고 있다.

 

① 성탄절에 대하여

 

▷ 크리스마스(Christmas) = 그리스도(Christ) + 미사(Mass) / 미사란 라틴어 “MASSA”에서 나온 말로서 이것은 속죄를 위해 드리는 제사를 의미한다. / 로마 카톨릭에서 비롯된 절기

 

▷“크리스마스는 초기 교회(초대 교회)의 축제들 중에는 없었다."(대영백과 사전)

 

▷“크리스마스는 교회의 가장 초기에 있었던 초기 축제일에 들어 있었던 축제가 아니라, 그 축제의 기원은 이집트이다."(가톨릭 백과사전, 1911년판)

 

▷ 주후 349년 로마 교황 율리어스가 공식적으로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로 선포함.

 

▷ 고대 로마의 농경신 사툰(Saturn)과 태양신 미트라(Mithras)를 기념하기 위해 로마 세계의 시민들이 이미 광범위하게 지켜 오던 날.

 

▷‘정복할 수 없는 최고신인 태양신의 축제일로 지켜짐'(카톨릭 백과사전 제3권, p.727)

 

“이 날은 바빌론의 태양신의 날입니다. 12월 21일은 동지로, 지구가 태양의 영향력에서 가장 멀어지는 날이며, 24일부터 태양의 영향력은 커지기 시작합니다. 태양신을 숭배하는 자들은 여기에 생명이 다시 돌아온다는 의미를 부여했는데, 바로 이러한 믿음으로 태양신인 바알의 생일이 12월 25일이 되었습니다. 태양은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리며 경배되었는데, 그 이름은 탐무즈, 호러스, 이시스, 솔 등으로 불리웁니다. 그래서 태양신의 축제인 크리스마스는 마시고 즐기며 술 취하고 아기들을 바알에게 희생 제물로 바치는 날이었습니다.”

 

「대영백과사전」도 그 기원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12월 25일에 기념하는 이유는 불확실하지만, 초기 기독교들이 '정복당하지 않는 태양의 탄생일'(Natal is Solis Invicti)이라는 로마의 이교 축제와 같은 날에 기념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 이교 축제는 낮이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고 태양이 하늘 높이 떠오르기 시작하는 동지를 기념한 것이었다. 따라서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전통 관습들은 이교도들이 한겨울에 벌이던 농신제 및 태양 의식들과 그리스도의 탄생을 한데 합쳐서 생기게 된 것이다. 로마 세계에서는 농경신 사투른을 기념하는 축제일‘사투르날리아'(12월 17일)에 흥겹게 지내며 서로 선물을 교환했다. 또한 이란 사람들은 12월 25일을 신비로운 신, 미트라(정의의 태양)의 탄생일로 여긴다. 로마력 설날(1월 1일)에 사람들은 자기 집을 푸른 나무와 등불로 장식했고, 자녀들과 가난한 사람에게 선물을 주었다. 튜튼족이 갈리아, 브리튼, 중앙 유럽으로 침입해 들어오면서 게르만족과 켈트족의 크리스마스 축제 의식들이 이러한 관습들에 융합되었다.

 

음식과 교제, 크리스마스 이브에 벽난로에 때는 장작과 크리스마스 케이크, 푸른 나무들과 전나무들, 선물과 인사 등이 이 축일을 기념하는 행사가 되었다. 이교도에게나 기독교도에게나 겨울 축제일은 언제나 따뜻함과 꺼지지 않는 생명을 상징하는 불, 등불들과 관련되었다."

 

 

 

▷ 선교적 차원에서 이루어짐(* 예를 들면 한국의 유교적 풍습에 따른 제사 문제가 복음전파의 박해 문제로 결국은 선교적 걸림돌이 된다고 하여 이후 로마 카톨릭에서는 제사를 드려도 된다고 함.)

 

▶ 크리스마스 때 행하는 여러 풍습들에 대한 고찰

 

1) 크리스마스 트리

 

고대 바빌론 전설에서는 한 푸른 나무가 죽은 그루터기에서 솟아날 때 새 푸른 나무는 님롯이 탐무즈를 통해 부활한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에서는 농신제 기간 중 붉은 열매들로 전나무를 장식했습니다(월쉬의 <대중관습의 진경>).

 

성경에는 이방인들이 푸른 나무를 경배했다는 내용들이 나옵니다(왕상 14:23). “그 백성들의 관습은 헛된 것이니, 이는 사람이 숲에서 도끼로 나무를 자르고 기술자가 손으로 만든 작품이라. 그들이 그것을 은과 금으로 꾸미고, 못과 망치로 고정시켜 움직이지 않게 하는도다. 그것들은 종려나무처럼 곧게 서 있으나 말을 못하고, 걸을 수도 없으니, 꼭 붙들어 주어야 하느니라. 그것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는 그것들이 악을 행할 수도 없고, 또 선을 행함도 그들 안에 없음이라"(렘 10:3-5). 이처럼 위 성경구절들에 나타난 바와 같이 예레미야 시대의 사람들도 사실상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나무를 잘라 장식들을 꾸며 이를 즐거워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선물교환

 

“친구들과 어울려 선물을 주고받는 것은 크리스마스와 농신제가 매우 흡사하다. 그리고 그것은 기독교인들이 이교도에게서 받아들인 일임이 틀림없다"(대영백과사전 12권 pp.153-155).

 

“크리스마스 시즌과 관련된 상당한 것들, 즉 휴일들, 선물교환 및 일반적인 온정은 이교주의의 잔존물인 로마의 겨울 농신 축제가 계승된 것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이다"(베일리의 <로마의 유산>).

 

3)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산타클로스(Santa Claus)는 4세기 경 네덜란드의 대주교인 “성 니콜라스"를 따라 부른 것입니다. 그가 결혼을 못한 가난한 새 여인에게 결혼 지참금을 마련하여 준 것이 전설이 되어 신발 또는 양말에 선물을 넣어주는 풍습이 생겨났으며, 이교도의 사랑의 신인 베스(Bes)가 겨울에 북극에서 썰매를 타고 와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준다는 전설과 혼합되어 오늘날 썰매를 타고 선물을 주는 산타클로스가 된 것입니다(대영백과사전 19권 pp.648-649).

바로 이러한 내용들을 통해 볼 때 크리스마스는 사람이 만든 미신적인 전통이며, 그래서 초대교회 이래로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태양신의 날이나 농신제의 축제를 즐기지 않았습니다.

 

▶ 성탄절에 대한 비판적 입장

 

1) 1620년대 미국의 청교도들은 크리스마스에 선물이나 인사를 주고받거나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차려 먹는 행위를 사탄의 관습으로 간주하여 그러한 행위를 금지하였고, 그것을 위반할 경우에는 5실링의 벌금을 물도록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날이 태양신을 기념하는 축제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620년 미국에 건너온 청교도 이민에 관한 기록을 보면 메사추세츠 법원에서는 크리스마스를 지키는 사람들을 형사법으로 처벌하는 것까지 공포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2) “크리스마스 놀이는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완전히 세상에 속한 것으로서 로마가톨릭의 이교적인 관례이므로, 더 이상 당신이 이 열매 없는 어둠의 일과 교제할 수 없음을 분명히 말하십시오. 당신이 주님께 속한 자유인이므로 세상에 속한 이 값비싼 관습에 매여 있을 수 없음도 말입니다."(아더 핑크 목사)

 

 

 

➁ 부활절에 대하여

 

 

 

▷ 메시아의 탄생과 부활을 통해 영생을 바라는 기독교 내에서 부활절은 성탄절과 함께 가장 중요한 양대 절기이며 교회력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고난 주간의 금요일에 죽어 장사되신 주님이 사흘 만에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을 가리킵니다. 기독교 내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을 역사적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이 믿음을 통해 주님 안에서 세상의 끝 날에 우리도 부활하여 그 옛날 에덴동산보다 더욱 좋은 천국에서 살게 될 거라는 복음의 진정성을 증거 해 주는 결정적 사건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현대의 부활절 행사는 성탄절 행사와 더불어 자본주의 시장 경제 속에서 너무 많이 세속화되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교회에서 부활절 기념행사로 음악회나 egg hunting 같은 이벤트들이 개최되기도 하지만,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영적 만남과 성숙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각 연령층의 문화적 욕구를 해소하는 데에 그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입니다.

 

부활절을 기대하며 준비하는 많은 종교 행사들(고난주간 기도회, 금식, 금욕 생활 등)에 비해 부활절 자체를 이해하고 기념하는 본질적인 의미를 되새기며 찾고자 하는 진정한 부활의 의미를 찾아보기 어렵게 된 것입니다. 또한 현재 시행하는 부활절 행사들도 극히 제한되어 있고 너무 세속화 되어서 명목뿐인 종교적 행사로 전락해 버리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 부활절의 기원과 유래

부활절을 의미하는 영어 ‘Easter’는 고대 앵글로 색슨어인 ‘Eastre’와 ‘Ostara’의 합성어로서 독일 서북부 색슨족(Saxon)이 숭배한 새벽과 봄의 여신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Barnes's의 성서사전). 2세기경 기독교 선교사들이 그 지역에 복음을 증거 하러 들어가서 이러한 원주민들의 미신적인 종교절기를 알게 되었고, 그들을 선교적 차원에서 개종시킬 목적으로 그 이방 절기를 통해 기독교를 점진적으로 전파시켰을 것이라는 설이 설득을 얻고 있습니다.

이는 성탄절과 마찬가지로 초대 기독인들이 자신의 생존과 복음 전파를 위해 기존에 존재하던 이방신의 축제일에 맞춰 그들의 성일을 겸하여 지키면서 세상 속에 파고들었던 것과 같은 맥락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부활절의 정확한 시기에 대해서는 교회들 간의 주장이 서로 팽팽하게 맞서 3세기까지도 교회 논쟁의 불씨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아무튼 지금의 부활절은 A.D 325년 제1차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언제나 유월절 기간이어야 한다는 동로마 교회들의 주장과 반드시 주일이어야 한다는 서로마 교회의 주장을 통합하여 유대교의 종교력 춘분 다음에 오는 일요일로 정해지게 되었고 지금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 부활절 토끼와 달걀

그림이나 인터넷 사이트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부활절 토끼는 현대의 발명품이 아닙니다. 이 상징은 앞에서도 언급했던 앵글로 색슨족의 여신이었던 ‘Eastre’의 세속적 상징 동물이 바로 토끼였기 때문입니다. 이 토끼 상징은 독일인들에 의해 처음으로 미국에 소개되었는데 초기 미국 교계에서는 무시되다가 남북 전쟁 이후 카톨릭 교회에서 받아들이면서 부활절의 상징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에서 가장 친숙한 달걀 나누기는 원래 새해에 행해졌던 것이나 유대의 종교력(유월절)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때가 주님이 고난 받았던 기간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절의 상징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달걀은 여러 서양 이방 종교(미신 종교)에서 새로운 생명의 잉태를 의미하는 상징물로 사용되었고 후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상징물로 교회에서 받아들여졌던 것이죠. 그래서 이러한 미신적인 놀이가 기독교에 들어오면서 부활절 달걀의 껍질은 예수께서 사흘 동안 머무신 바위무덤을 상징하고 달걀 껍질의 채색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흘리신 피를 상징했던 것에서 기인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부활절 달걀 채색에 대한 많은 유래들이 있으나 대표적인 이야기로는 남편을 잃고, 살던 집조차 빼앗겨 살 길이 막막했던 어느 불우했던 부인을 친절한 마을 사람들이 돌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부인은 고마운 마음에 친절한 마을 사람들을 축복하는 글과 성구를 적어 나누어 주었고 이것이 점점 보편화되었다고 합니다. 이때 달걀을 붉게 채색하였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준 희생의 피를 상징하였고 마을 사람들의 고마운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비교한 것이었습니다. 현대 미국교회에서는 이런 달걀을 채색하여 숨겨두고(요즘엔 플라스틱 달걀 속에 캔디나 초콜릿을 넣어 대신 사용하기도 한다) 아이들에게 찾게 하는 달걀 찾기, 달걀 굴리기 등의 행사에 응용되어 시행되고 있는데 이러한 풍습이 피선교지인 한국에 미국적 영향을 따라 복음의 전파와 함께 분별없이 들어온 것입니다.

 

➂ 추수감사절에 대하여

 

오늘날 교회가 추수감사절을 구약의 수장절(장막절, 초막절)을 근거로 절기를 지키는데, 사실 추수감사절은 구약의 절기적 배경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시작에 있어서 교회적 절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신대륙으로 건너온 청교도인들이 교회당을 짓고 학교를 짓고 집을 짓고 또 농사를 짓고 하면서 그 수확한 것을 가지고 원주민들과 친밀한 사귐 속에서 하루를 즐겁게 지내고자 한 것이 그 시작입니다. 그것이 점차 국가적인 성격을 띠어 나갔을 뿐만 아니라 당시 주민들은 다 기독교인들이요 그래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주체가 교회였기 때문에 교회적 절기로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미국의 추수감사절인 것이지, 온 세계의 공교회의 절기의 성격을 띠는 보편적인 절기가 아닌 것입니다.

 

바로 우리나라는 미국의 추수감사절을 받아들여서 교회가 교회적 절기로 지켜왔을 뿐입니다(캐나다도 미국 문화의 영향을 받음). 자! 그런데 우리나라(한국)에는 추석이 있습니다. 이 추석은 민족적인 절기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국의 추석이 민족적인 절기로서 이를 교회에 가지고 오면 추수감사절이 되듯이 그렇다고 추석이 공교회적인 절기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미국의 추수감사절을 우리나라 교회가 교회적 절기로 굳이 적용하여 나가야 하는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 추수감사절은 구약적 절기의 배경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구약의 모든 절기는 그리스도의 사역의 모형론적(예표적)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추수감사절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이 기독교인으로서 추수감사절을 행하여 나간 것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인에게서 시작이 된 것이 점차 국가적인, 다시 말해 기독교인이든 기독교인이 아니든 다 지키는 민족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의 추석은 처음부터 기독교와는 상관없는 민족적인 절기로 지켜져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기독교인이든 기독교인이 아니든 추석을 보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캐나다에 살기에 한국 사람이지만 추석을 잘 지키지 않고 이곳 캐나다 감사일(Thanksgiving Day)을 공휴일로 보낸다.)

 

성도 여러분!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하면, 미국의 추수감사절이든 우리나라의 추석이든 그것이 교회 절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게 설사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정신 속에서 가져 나간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서 결코 교회 절기로 적용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혹시 추석과 추수감사절의 의미를 구약의 절기인 수장절에서 찾는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앞에서 살핀 바 구약의 절기의 모든 예표적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으로 단번에 이루어진 사건 속에서 감사의 내용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 나오는 말 / 해마다 맞이하는 절기에 대한 우리 교회의 신앙적 자세

 

올해도 어김없이 추수감사절을 보내며 다가오는 겨울에 나라마다 온 길거리에서는 성탄의 캐롤송과 찬송을 통해서 분위기를 띄우고, 이 분위기에 편승하여서 술집들과 가게들은 성황을 이룰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한국적 상황). 특히 성탄절만큼은 신자와 불신자의 구분이 없습니다. 오히려 불신자들이 더욱 즐겁게 지내며 성탄절을 세속의 쾌락을 위해 잘 이용합니다. 그런가 하면 교회도 여전히 이교도적인 종교 풍속에 젖어서 온갖 종교적인 행사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특히 사람들은 성탄절을 쉬는 날로 갖는 모처럼의 기회를 최대한 이용하여서 친구와 연인 간에나 가족들 간에 오락과 유흥(쾌락)을 즐기는(우리 안에서 올라오는 육체의 욕망으로), 참으로 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본의는 사라지고, 이제 성탄절은 결코 성탄절이 아닌 인간의 축제의 날에 지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비록 그런 성도가 다는 아닌 일부일지라도 교회가 그런 여건과 환경을 세상에 조장하고 허락하고 있는 한에는 교회의 책임을 회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이러한 교회절기를 통해 어떠한 신앙의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사랑하는 갈보리 성도 여러분! 성부 하나님의 보내심에 의해서 예수님께서 사람(성육신)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 값을 담당하시고 죽음을 당하심으로 단번에 드린 헌제사역(대속물)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부활로 구원을 완성 하셨습니다.

 

이제 교회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 곧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행하셨고, 앞으로도 계속하여 행하시는 구속의 은혜 안에서 기념하는 날인 주일을 복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지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의 신앙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의 총체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서 모여 하나님의 하신 모든 구원의 일과 이루신 영원한 안식을 누리며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말씀과 성례를 통하여 은혜를 받는 날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고 지키고자 하는 성탄, 부활, 사순절, 추수감사절 등이 다 구속의 완성을 이루시고 영원한 안식과 영생을 허락하신 주일 안에 내포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하기에 오늘 주일날은 성도로서 참된 생명을 공급받으며, 주의 크신 구원의 은혜에 참여하며, 그리하여 넘치는 감사와 경배를 삼위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생명 그 자체인 것입니다. 만일 주일에 대한 우리의 신앙이 일상적으로 그리스도와 생명의 관계를 이루고서 사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고, 그래서 주일이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고 있으며, 또 우리의 삶의 중심에 주일을 모든 의식과 절기와 감사의 제사를 완성한 자리로 여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구원의 완성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온전히 믿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직도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옛 구약의 그림자를 좇아 살아가는 구약 백성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단지 일 년에 어느 한 날을 특정한 날(절기)로 삼고서 지키고자 하는 그것이 아무리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쁘시게 하며 성도들과 즐거운 교제를 하기 위해서 온갖 행위를 가질지라도 사실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성경이 가르시는 사상과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1장 1조 2항 -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합당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신바이다. 그것은 그의 계시하신 의지, 곧 성경말씀으로 한정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상상이나 고안된 것으로 하나님을 섬겨서는 안 되며, 기타 비성경적인 방법을 사용해서도 안 된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는 방식을 좇아 바르고 참되게 섬기고자 하는 우리 갈보리 장로교회는 매 주일 마다 온 성도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태(姿態)에서‘주의 오심을 기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하심과 부활로 인하여 주신 구원 감격하며, 이 구원을 나에게 베푸신 한량없는 은혜에 늘 감사하는 삶’을 간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러한 교회력에 따른 절기를 맞이할 때마다 우리교회에서는 그 절기의 날을 지키지는 않아야 하겠지만, 오히려 이러한 기회를 통하여 절기에 담은 복음의 내용을 설교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다가오는 성탄주일(가장 가까운 주일)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하여, 그리고 부활주일에는 그리스도의 속죄와 부활에 대하여, 그리고 감사주일에는 진정한 감사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설교하려고 합니다.)

 

아무튼 너무나도 오랫동안 교회 절기가 전통 있게 이어져 내려오다 보니, 그래서 누구나 의례히 교회 절기로 지키는 것을 당연시 여겼으며, 이것이 성도들이 갖는 바른 신앙인 것처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도무지 성경적인 내용을 말씀드려도 이 의식의 변화를 쉽게 기대할 수가 없을 것 같지만...(저 또한 몰랐을 땐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 교회가 종교개혁의 유산을 따라 오직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를 세워가고자 소원하기에..., 오늘 함께 나눈 절기에 대한 내용을 말씀의 가르침을 따라 분명하게 나아가고자 한다면, 거기에 진리가 서게 되는 것임을 오히려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갈보리 교우 여러분! 시대에 순응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고, 그래서 ‘사람을 기쁘게 하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습니까?’ 바로 이 고백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향하여 외친 복음을 복음 되게 드러내고자 한 고백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도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이 시대상황과 환경과 좀처럼 변하지 않는 종교의식 속에서도, 이제 우리 교회는 종교개혁의 선진들이 남긴 유산인 성경으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역사적 신앙고백을 따라 인내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를 세워가야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때로는 주의 주신 은혜를 인하여 시대 앞에 주의 말씀을 확연하게 드러내며 나아갈 때에 받는 핍박과 고난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주신 영광이요, 시대 속에 영광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없는 진리를 간직한 기쁨이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