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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RCH(교회)/SADARI CHURCH(사다리교회)

축도란 무엇인가?

 

이글은 이성호교수님의 개인 블로그의 글을 노승수목사님께서 약간 다듬은 글을 그대로 올립니다.

(아~ 나는 감사하게 그냥 먹넹...ㅋㅋ)

 

설교는 목사가 꼭 해야한다고 인정하더라도 축도는 누구나 할 수 있지 않을까? 설교가 전문적인 훈련을 필요로 한다고 인정하더라도 축도는 그냥 성경 구절을 암송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간단한 축도는 아마 유치원 아이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돌아가면서 하는 것은 어떨까? 사실, 오늘날 설교자의 축도는 계속 도전을 받고 있다.

개혁교회에서 축도를 목사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축도가 말씀 선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으며, 또한 회중 교회와 달리 개혁교회에서는 직임과 직분자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아무리 간단한 일이라 하더라도 교회가 그 역할을 맡긴 자만이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개혁교회에서 이렇게 된 이유는, 성도들로 하여금, 그 일을 하는 사람을 대단하게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 자체를 귀하게 생각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만약 누구나 축도를 할 수 있다면, 성도 모두가 참여한다는 점에서 민주적이고 예배 활성화는 가능할련지 몰라도 축도 그 자체의 중요성이 현저하게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연히 회중은 예배 중에 축도나 가정에서 아빠나 아이들을 축복하는 것 사이에 전혀 비중의 차이를 두지 않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현대 교회에서 흔하게 목격이 된다. 실제로 전에 사역하던 어느 교회에서는 설교자가 축도를 할 때, 축도가 끝나면 예배당을 빠져 나가기가 혼잡스러움으로 중간에 일어나 빠져나가는 교인들이 많은 수가 있었고 그것을 방치하는 목회자를 본 적이 있었는데 참으로 안타까웠다. 이런 현상은 성도들이 축도의 중요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축도를 축복기도의 준말로 생각하여 특별한 기도의 형태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로 축도를 할 때 많은 사람들이 눈을 감는다. 또한 많은 교회에서 "~있을 지어다"를 "~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로 바꾸고 있다. 특히 통합 교단은 이러한 경향을 총회적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이 결정에는 장로들의 입김이 아주 컸다고 한다. 젊은 목사가 "있을 지어다"라고 하니 나이 많은 장로들이 영 거북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는 신학적 성찰과 숙고를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하지 않고 그냥 민주주의의 원리에 따라, 힘의 원리에 따라 내린 어리석은 결정이고 이 결정은 여간 실망스러운 것이 아니다.

이렇게 바뀐 이유 중의 하나는 축도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잘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축도를 기도의 한 형태로 이해한다면, 장로가 얼마든지 축도할 수 있을 것이다. 장로가 기도는 하는데, 왜 축도는 하지 못하는가? 집사도 못할 이유가 뭔가? 아마 큰 아들이나 어린 딸아이도 시키면 모르긴 몰라도 아마 아주 잘 할 것이다. 실제로 요즘 평신도 운동을 하는 사람 중에 축도를 축복기도와 혼동을 하여, 성경에 "서로를 위해서 축복하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누구든지 공예배에서 축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축도는 Benediction이라고 한다. 라틴어에 나왔는데 문자적인 의미는 "좋은 것을 말함"이라는 뜻이다. 핵심은 복을 비는 것이 아니라 복을 선언하는 것이다.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축도를 말씀에 대한 최종적인 봉사로 이해하였다. 즉 축도를 기도가 아니라 설교의 한 형태로 이해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祝禱라는 번역은 마뜩치 않다. 왜냐하면 빌 ''축"자에 기도 "도"자를 써서 축도라고 번역을 했기 때문이다. 영어의 축도를 하다는 표현의 숙어는 "pronounce a benediction" 프로나운스는 공적 선언 혹은 입장 표명등을 담은 동사다. 판사가 법정에서 판결을 내린다고 할 때 쓰이는 단어가 바로 프로나운스이다. 베네딕션은 하나님의 은혜, 돌봄, 복을 의미하는 blessing과 유사한 개념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 블레싱이나 베네딕션을 번역할 때 축복이라고 번역을 하다보니 이런 문제가 생긴다. 왜냐하면 축복이란 복을 빈다는 의미의 한자 조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축복이라는 말이 블레싱의 역어이다보니 이런 오해를 자주 낳는다. 그런데 국어 사전에 축복을 찾아보면 두번째 뜻에 "하나님이 복을 내림"이라고 해두었다. 사전적 정의는 명확한 셈이다. 그리고 우리가 익숙하게 쓰는 영어 표현을 생각해보라 "God bless you"이다. 축복을 복을 빈다는 개념으로 이해서는 안되고 하나님이 복을 내린다는 개념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축도는 강복선언이라고 번역하거나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다. 축도라고 번역하더라도 하나님이 복을 내리시는 것을 선언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는것이다.

따라서 축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리시는 복, 곧 복음이신 그리스도를 강설한 설교자가 해야 하는 것이다. 목사가 아니고 설교자라고 한 이유는 설교한 사람이 축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가 이 복음에 대해 강설하였고 그 강설한 복음에 대한 최종적 선포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2부 예배 때 설교는 부목사가 하고 마지막 축도는 담임 목사가 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연합 예배나 위임식 등에 가 보면 설교따로, 기도따로, 성경 봉독 따로, 축도 따로... 정말 내가 보기에 안스럽다. 또한 "오늘 들은 말씀을 듣고 ~하기를 진심으로 결심하는 자들이게"라는 구절은 전혀 불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복은 언약적인 관계 안에서 실현되는데, 축도는 바로 그러한 언약 공동체를 이미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복은, 우리의 믿음을 요구하지만, 인간의 결심이나 결단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게다가 축도는 왜 그렇게도 긴지... 정말 기도화되어 간다. 축도를 길게 늘이고 첨가함으로 오늘날 축도는 인간적인 것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이 얼마나 복을 좋아하는가?" 올바른 축도는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가지고 하는 것이 가장 좋다. 고린도후서 13장 마지막 절과 혹은 민수기 6장에 나오는 것이 대표적이지만 다른 것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축도의 핵심은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이다. 이외에 더이상 우리에게 필요한 복이 무엇이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축도의 시간은 설교자가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복을 선언하는 시간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 다 눈을 크게 떠야 한다. 그리고 목사의 손을 바라보는 것이 좋다. 이것은 신앙고백도 마찬가지인데 한국교회에서 신앙고백이 기도처럼 된 지 꽤나 오래되었다. 혼인 서약을 할 때, 눈감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러 증인들 앞에서 이 사람을 사랑하고 평생을 배우자로 맡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임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두 눈을 뜨고 당당히 말해야 하듯이 신앙고백도 그렇다. 이처럼 축도도 눈을 뜨고 설교자의 손을 바라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